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주 4.3사건 (문단 편집) == 과정 == 1948년 4월 3일, [[5.10 총선거]]를 반대하고 이른바 통일된 조국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던 남로당 제주도 지부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하고 경찰 가족을 살해했다. 사망은 경찰 12명, 경찰가족 6명, 공무원 5명, 민간인 37명 등 60명이었다.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군경들의 대처였는데, 그들이 파악한 최대 무장대 숫자는 500명이었으나 제주도민 전체를 배후로 보고 무장대 본부가 있는 [[한라산]]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해버렸다. 그리고 군경[* 이 때 파견된 경찰 중에서 경무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작전과장 [[최치환]] 총경이 작전참모로 파견되었다. 참고로 최치환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의 장인이다.] 및 토벌대들은 이 근처를 얼씬거리는 사람은 남로당 무장대로 간주하여 가차없이 죽였다. 특히 [[서북청년회]] 소속 토벌대들은 노인, 어린이, 아기, 성별을 가릴 것 없이 일반 서민들을 빨갱이와 한통속으로 치부하여 모조리 죽여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해안지대로 소개된 일반 서민들마저 가족이 없으면 대신 살해당하는 대살(代殺)을 당했다. 이들 서북청년회는 월남한 지주나 이북 출신 [[조직폭력배]], 친일세력 장정들이 주류로서 제주에서 화풀이와도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진압군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으로 악명높았다. 학살, 약탈, 강간 및 살인연습 등의 증언자료가 남아있다. 심지어 여성들을 강간한 후에는 감자와 고구마를 질에 누가 가장 많이 넣을 수 있는지 시합을 시켰다는 기록도 다수 존재한다. 물론 군경들뿐만 아니라 [[빨치산]]들도 심심하면 내려와서 군경에 협조하는 반동분자를 처단한답시고 도민들을 학살하곤 했다. 전체 희생자 중 약 20%가 무장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주민들이 해안가에 몰려사는 이유로 흔히 해안가에 물이 존재해서 그렇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중산간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구나 중산간 일대에 나름의 반촌 성격의 집성촌이 많았었기에. 하지만 4.3사건을 겪으면서 죄다 초토화되었고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지금껏 복구되지 못한 마을도 상당수이다.] 그러니까, 벌건 대낮에는 서북 청년회의 토벌대 및 군, 경찰이 '빨갱이 색출'을 하고, 빨치산들이 나올 시간인 저녁에는 하산을 해버린다. 그리고 저녁에 빨치산들이 내려와서는 살기 위해 군경에 협조한 서민들을 학살하는 것. 실제로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를 살펴보면, 당시 진압을 맡았던 조선경비대 제 9연대가 전체 도민들 중 10%가 공산주의자거나 공산주의에 동조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대량 학살계획(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되어 있다. 초기에 군경과 빨치산 사이에서 강화가 이루어져 사건이 조기에 끝날 수 있었으나, 서북 청년단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습격 사건이 이어지면서 화의가 깨지고 말았다. 당시 군경은 귀순자들을 모아놓는 전략촌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정체 불명의 무장세력이 전략촌 및 전략촌으로 이동중인 귀순자들을 습격한 것. 경찰은 "배신자들에 대한 공비들의 보복"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재는 협상 및 토벌의 주도권이 경비대로 넘어간 데 대한 경찰측의 훼방놓기로 보고 있다. 실제 습격 현장에서 체포된 포로가 자신은 경찰관이며 제주경찰서장의 명령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물론 경찰 측에서는 좌익의 이간질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도 여명의 눈동자에 묘사된다. 물론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가명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참고로 이때 온건책을 주장하다가 잡혀간(!) 국군 장교는 한국전쟁 개전 당시 1사단 제13연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한 김익렬 대령(4.3 당시 중령)으로, 이후 한국전쟁 내내 용감히 싸워 기량을 인정받은 우수한 장교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 내내 진급은 했으되 한직을 주로 거치다가 박정희 집권 이후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1969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남긴 4.3 관련 회고록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일부 우익단체에서는 그의 4.3 사건 당시 행적과 그의 회고록을 근거로 김익렬을 좌익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말이 안 되는게, 한국전쟁 때 공산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올린 장교가 좌익이라는 건 어불성설이며, 그를 내치지 않고 어쨌든 자리를 준 이승만과 고위직에 앉힌 박정희 역시 좌익과 한통속이라는 논리가 된다. 이 단체들이 지지하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좌익이 된다는 건 그들 스스로 우익단체가 아니라 좌익단체가 되는 셈이다.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 당시 국군측 김익렬의 반대편에서 강경진압책을 주장하다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드잡이질까지 간 경찰측 총수가 [[조병옥]][* 훗날 이승만 반대파의 총수가 되는 그 사람 맞다.]이다. [[한국전쟁]] 중 [[현리전투]]의 참패로 평가가 안 좋은 [[유재흥]] 장군 역시 4.3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 파견되었는데, 온건책으로 주민 피해를 줄였다. 거꾸로 말하면 얼마나 초기의 진압이 부조리하고 가혹한 것이었는 지를 증명하는 것이가도 할 수 있다. 항목 참조. 그리고 초대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 또한 임관하자마자 이곳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